최근 사흘 간 몸과 마음이 어려웠다. 나의 고질적인 상처가 다시 불거지는 일이 발생하면서 상당히 괴로운 시간을 그저 버텼다. 그 시간을 그저 매맞듯 버티다 보니, 마음은 산란해지고 두통에 시달렸다. 깨진 모래시계에서 모래알이 터져나가듯, 살 의욕이 쓸려 내려갔다.
그러다 오늘, '갈까 말까' 고민하다, 마음이 톡 '가자'로 기울게 되어, 오전 미사에 참례를 했다. 오전 미사로 나는 하루 살 기운을 다시 내볼 심산이었다. 서둘러 나가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교리선생님이 나타나셨다. 선생님은 나와 같은 고민을 이미 겪으셨던 분이셨다. 이미 나의 고질적인 상처를 잘 알고 계셨던 분이었다. 선생님이 대뜸, '잘 지내고 있어?'라고 물으셨을 때, '예~ 그럭저럭입니다~'로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쥐어짠 최선이었다. 이내 성전 끄트머리 의자에서 오랜 대화를 하게 됐다. 선생님은 당신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진심을 다해 나에게 무엇을 하는 게 좋을 지 얘기해주셨다.
'묵주기도는 해?'
'요새는 잘 못 했어요'
이런 식의 질문이 오간 다음, 선생님은 나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힘든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하고, 항상 기뻐하고 선행을 하고, 죄를 짓지 말고, 거르지 않고 기도하며 끊임없이 의탁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진심이 와 닿았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답답했다.
선생님과 헤어지고 오후 일과를 보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에게 내가 먼저 잘 해줘야만 하는 상황이 되풀이 되었고, 그 전처럼 나는 매맞는 기분으로 버텼다. 사실 그 사람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는데, 내가 내 자신을 쥐어패는 현장이었다.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 다시 홀로 되었을 때 마음이 착잡했다.
'내 이런 마음 상태에서 웃으라고? 그건 미친년이지... 그렇게 조커 하나가 탄생하는거야'
아버지를 찾아가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어떠한 말을 건내거나 기도를 하고 싶다기보다, 그저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을 내가 보고 느낄 수 있는 장소에 가서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가야겠다 싶어 발걸음을 성전으로 돌렸다.
성전에 올라가니 모든 불이 꺼져있었다. 구석 끝 쪽 의자에 앉아 성호를 긋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하고 불러보았다. 아버지가 사람처럼 서 계신다면 나는 그 발 끄트머리에 가서, 이마를 땅에 붙이고 무릎 꿇어 엎드리고 싶었다. 아버지 발목이라도 붙잡고 그렇게 엎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조용히 있었다. 안도감이었을지,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예상치 않게 눈물이 쏟아졌다. 눈물과 콧물을 쏟을 때, 내 의도와 달리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 저에게 어쩌라는 말씀이십니까! 저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아버지가 알려주십쇼! 저는 눈과 귀가 가려져서 모르겠습니다! 왜 교리 선생님을 통해 저를 비난하십니까! 제가 무엇을 더 합니까? 아버지 저는 지렁이같은 존재입니다! 그 꿈틀거리려는 버둥거림이 저는 모든 것을 쥐어짠 것이에요! 아버지 저는 먼지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일관된 생각도 없고, 일관된 결심도, 저와 관련된 어떠한 속성도 변치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제가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버지 저를 왜 여기에 두셨습니까? 왜 제가 이 인생을 겪게 하셨습니까? 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잊은 적이 있습니까? 제가 한 행동에 아버지를 의식하지 않고 한 행동은 없습니다! 아버지를 잊고 산 적이 없습니다! 제가 무엇을 더 해야 할까요! 아버지가 만드신 존재 아버지가 알아서 하십시오!'
잠시 고요 속에 있다 다시 성호를 긋고 나와 세수를 했다. 세수를 하고, 근처에서 공부하고 있던 지혜 자매에게 연락을 했다. 그저 같이 차 한잔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었다. 지혜 자매가 커피를 사주셨고, 근처 공원에 앉아 대화를 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 다시 내 마음에 걸리는 고민이 툭 나오게 되었다. 내가 가족을 대할 때, 비난과 통제를 피하려면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괴롭다고 토로했다. 어떠한 말도 행동도 소용이 없는 나의 무력함을 이야기했다. 나의 지혜가 부족해서, 이 나이 먹고서 쓰는 생존 방법이 고작 이딴 수준이라는 게 참 한심스럽다고도 했다. 갈짓자 걸음 걷 듯, 취객의 하소연 같은 내 이야기를 지혜 자매는 고요한 눈으로 들어주었다. 그 이후 시간은 삶을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지혜 자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매의 삶 단편에 잠시 내가 쑥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 또한 지혜 자매가 일상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이야기가 내 마음에 깊게 여운이 남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창세기 줌 모임에 들어갔다.
[1] 창세기 12, 1-2
"네 고형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 이다."
[2] 창세기 12, 11-13
11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 아내 사라이에게 말하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인임을 잘 알고 있소. 12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자의 아내다.’ 하면서,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 13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 그래서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또 당신 덕택에 내 목숨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오.”
[1]의 내용은 앞서 나왔던 바벨탑 이야기와 대비 돼 보였다. 바벨탑을 지었던 사람들이 움켜지고 정착하고 가만히 있길 선택했다면, 아브람은 하느님의 약속과 지시를 받아들여 떠난다. 당시 아브람의 나이는 무척 많은 나이였다. 유랑하는 부족을 이끌고 그 나이에 떠나라는 것은 많은 위험이 내포된 일이었다. 도적을 만날 수도, 전쟁을 겪을 수도 있고 목숨을 건 일이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정착하고 싶어지는데, 떠나는 게 그에게 쉬운 일이었을까? 게다가 하느님은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미리 말씀을 안 해주신다. '보여 줄' 땅이다. 수녀님이 설명해주시길, 하느님은 그 땅을 한번에 다 보여주시는 게 아니라, 내가 부름에 계속 응할 때마다, 내게 필요한 만큼씩만 조금씩 보여주신다고 하셨다. 또한 응했을 때 '너는 복이 될 것이다'라는 부분도 유념할 부분이었다. 나에게 복을 주시는 게 아니라 나 그 자체가 복이 된다고 하셨다. '아버지 하느님은 변화하길 원하시는구나. 아버지 하느님은 정착, 안주, 내가 아늑하게 고인 물이 되길 원하시지 않구나. 아버지는 항상 새로운 곳으로 가라 하시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탑을 쌓고, 움켜쥐고, 본인 아집이 메인이오 하느님은 곁들임 정도로 초대했던 바벨탑의 사람들과 달리, 아브람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떠난다.
[2]의 내용이 내게 무척이나 와닿았다. 아브람이 본인 아내에게 거짓말을 시키네? 거짓말을 하는 게 서로 목숨을 구하게 되는 유일한 최선이니 그리 하자는 아브람의 모습은 나와 같았다. 사실 아브람에게 별 수가 있었을까? 파라오는 강력하고, 사회 관습은 그러하고, 아브람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유일한 살 길은 거짓말이었다. 그게 아브람의 한계였고, 아브람의 최선이었다. 이러한 아브람의 모습을 읽으니, 앞서 읽은 노아에 대한 내용이 생각났다. 술 먹고 알몸으로 잤던 노아에 대해 얘기할 때 수녀님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이, 도덕적/윤리적으로 결함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그 설명이 아브람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그 의로움은 하느님과 일상 속에서 같이 걷기를 원하는 자의 자세에 가까웠다. 하느님은 완벽한 사람을 뽑는 게 아니시다. 하느님은 약함이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이끄신다. 이끄시는 중에 그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하느님을 어떻게 만나는지에 초점을 둬야 한다.
내가 나의 한정된 경험과 지혜로 나의 방식을 선택하듯, 이 대목의 아브람도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명령과 함께 내렸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잘못 속에서도 선을 끌어내신다. 이 대목을 설명하시면서 수녀님은 부활 때 신부님들이 외는 '오 복된 죄여'라는 구절을 소개해주셨다. 마음대로 죄를 짓자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죄를 지었어도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나아갈 때 그 죄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복된 통로가 된다는 말이다. 상처가 있다면 그 상처는 하느님께 가는 걸림돌이 아닌, 오히려 디딤돌이 되게 된다.
또한 아브람의 자세를 보자. 아브람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브람도 나처럼 뻔히 알았을 거다. 거짓말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행동이라는 것을. 부득불 이것 밖에 선택할 게 없는, 숨 붙어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선택이었을 거다. 그런 그가, '하느님 저는 역시 몹쓸 인간입니다. 저는 포기하시고, 그릇이 될만한 사람에게 명령하신 것을 맡기십쇼'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분명 자성하는 과정 중에 나처럼 괴로웠을 거다. 본인 꼴을 봐라. 책임지고 아내를 보호하기는 커녕 아내더러 거짓말을 시키고, 심지어 파라오가 부르면 그에게 가보라는 식으로까지 말을 한다. 본인 스스로가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러나 그는 하느님과의 관계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떠나서 가라는' 명령을 매일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행동으로 응답하고 계속 갔다.
후에 아브람이 풀려나 롯과 유목 생활을 했을 때, 자원이 부족해지자 롯에게 선택권을 먼저 주는 모습이 등장한다. 네가 선택한 것의 나머지 것만 나는 가지겠다는 그의 배려는 '착함'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건 그가 움켜쥐지 않았기 때문이다. 움켜쥐는 불안과 조급함이 없었던 이유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유가 어디에서 왔을까?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아브람은 내내 의로웠다. 믿음과 응답이 그를 의롭게 만들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은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부르심에 응답해서 행동으로 옮긴다면, 과연 내가 정말 하느님 뜻에 맞게 가는지는 어떻게 식별해야 할까?
이 부분에 대해 수녀님께서 말씀 해주셨는데, 한가지 단서는 주변 상황이 난리가 나도 그분 앞에서 기도할 때 평화가 있을 때라고 하셨다. 주변에 휩쓸리지 않는 평화가 있을 때, 내 응답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가고 있다는 뜻이라고 하셨다. 마음 속 갈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감정 역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감정들 밑바닥에는 평화가 있다고 하셨다. 밑바닥에 '괜찮다'가 떠오르는 그 평화가 징표라 하셨다. 또 수녀님께서 사람들과의 갈등에 대해서도 언급하셨는데, "이 모두에게 당신의 선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걸 말씀하셨을 때 마음에 와닿았다.
지금은 피곤해서 다 적을 수가 없지만, 줌 미팅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 내 일련의 일생과 경험들이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이었구나'라는 생각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오늘도 아침부터 지금 그 순간까지 있었구나!'라는 감격이 벅차올랐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길 위에 과자가 하나씩 놓여있고 하나씩 주워먹으면서 따라올지 말지 자유의지는 나에게 주신 듯한,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하루 동안 여러 사람을 통해 핑퐁 치듯 나를 아버지께 부르시고, 나를 부드럽게 밀어 내가 아버지께 질문 하게 하셨고, 창세기 말씀과 수녀님, 그리고 조원들을 통해 내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게 하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를 모르는 그 상황마저도, 그 때의 나의 아픔과 상처마저도 아버지께 오는 길로 만드셨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울러 아브람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던 생각은, 나의 '어떻게, 무엇을'이라는 것보다 중요한 게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점이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제일 중요했네!'라는 깨달음이 깊게 밀려들어왔다. 아브람이 본인 지혜의 한계로 죄를 지었을 때도, 그리고 노아가 반듯하지 않는 행동을 했을 때 역시, 그들은 계속 응답하며 하느님께 나아갔다. 이 점이 나에게는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각자 소감을 나누는 시간 중에, 수녀님이 다른 조원의 말에 코멘트를 해주신 내용이 인상 깊었다. '인생은 밝음과 어두움이 반씩 존재한다. 나의 과거, 어두운 순간 속에서도 빛은 존재했다. 과거를 무기력하게 해석해버리면, 나의 그 과거에 대한 해석이 미래에 대한 태도가 되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해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하느님이 그 나의 경험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셨을까?' 식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때도 충격을 먹었다. 그렇네, 하느님이 계셨네. 내 그 과거에는 하느님이 어떻게 흔적을 남기셨을까? 어떻게 존재하셨을까? 나는 이제 이 과거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