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 11, 3-4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나의 생각
처음에 바벨탑을 읽을 때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오히려 나에겐 높게 쌓아올린 바벨탑이 기술력, 발전, 성실한 노력을 내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바벨탑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인터넷에 잠시 찾아 보아보니, 바벨탑은 '하느님이 세상에 내려올 때 딛는 계단'을 의미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느님이 세상을 내려올 때 딛는 계단'을 열심히 지은 사람들이 아닌가? '이들은 하느님을 잊지 않고 산 사람들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또한, 기술진보를 통해 풍요로움을 만들려 노력하고, 만든 걸 지키고, 이름을 알리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성실하고 부지런했으며 하느님을 위한 건축물을 만들었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이러한 생각을 갖고 줌에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성서를 읽기 전에 수녀님이 창세기에 반복적으로 나왔던 ‘하느님의 축복‘에 대해 다시 설명해주셨다. 사랑은 고여 있을 수 없고, 필연적으로 나눔의 행위로 퍼질 수 밖에 없다고 하셨다 정체되고 고이면 썩게 된다고. 나만 깨닫고 나만 느끼고 나만 소유하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하신 일을 서로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셨다.
그러한 말씀을 듣고 다시 해당 구절을 읽으니, "바벨탑은 ‘널리 퍼져 번성하라(서로 돌보고 사랑하여라)’는 축복과 정반대의 행위였구나"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겉모습은 신의 계단을 짓는다고 하지만 그를 통해 결국 알리고 싶었던 건 ’내 이름‘만이고, 하느님을 위해 한 일은 소재였을 뿐이다.
바쁘게 열심히 산다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의 목적과 내용이겠구나. 만약 바벨탑을 짓는 사람들이 짓는 행위에서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시인했다면 어땠을까? 그들이 그렇게 ‘흩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한편으론, 어쩌면 그들도 오늘날의 우리와 같은 사람이진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짓는데 동참한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께 도전하면서 스스로 위대해지고 싶다’라고 작정했던 건 아닐 수도 있다.
정말 어쩌면 그들은, 오늘날 우리처럼 성실히 산, 그저 보통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열심히 일해서 사회 속에서 살고 싶고, 나와 가족을 안전히 지키고 싶고, 그와중에 하느님을 위한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내 노고를 널리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던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한끗 차이로 놓친 것은 아마 하느님이 나와 함께 살아가시며 나를 통해 일을 하심을 인정하는 일이었을 것 같다. 하느님은 어딘가 따로 계시고, 오늘날 나는 여기서 살 뿐이라고 분리해서 살았지 않았을까 싶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행동이 아닌 ‘나만의 열심‘, ’나만의 설계’, ‘나만의 노력’이니 점점 폐쇄적인 시야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움켜쥐고 내 영역을 보호하며 아등바등하는 삶으로 점점 변질되는 거다.
하느님은 그러한 이들을 흩틀어 놓으셨다. 여기에서도 여러가지를 느꼈는데, 단순히 벌하고 멸해서 끝내지 않으시고, 되려 경직된 시각의 그들을 낯선 곳에 보내시는 모습이 자비로워 보였다. 약간 ‘네가 아는 게 다가 아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 유연하게 생각하렴’ 같기도 하고... 물론 터전을 잃고 억지로 낯선 곳에 갔을 그들 입장에서는 모든 게 무너진 심정이었겠지만..
두번째로 느낀 건, 그들이 아무리 자기 영역을 지키려 노력했어도 결과적으로는 흩뿌려지게 되었다는 거다. 아무리 내가 우기고 고집을 부려도 결국은 하느님의 섭리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구나.
나는 여전히 나 따로, 어디선가 계실 하느님 따로 살려 하는가? 하느님이 일하시는 삶에서 같이 살고자 하는가? 나 혼자만이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진 짐이 새끼 당나귀의 멍에라는 걸 인정하고 사는가?
하느님 없이 사는 삶은 지치고 두렵고 내 노력이 실패하지는 않을 지 불안한 삶이지만, 내 작은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인정하고 함께 하는 삶에는 실패란 없다. 내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삶에서 하느님과 같이 살자.
'가톨릭 > 교육 강론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아브람의 응답 (1) | 2024.04.27 |
---|---|
3월 27일(수) (1) | 2024.03.28 |
2월 21일(수) (0) | 2024.02.21 |
2월 18일(일) (0) | 2024.02.21 |
2월 1일 후속교육 (1) | 2024.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