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밥답게 먹어야 한다. 밥은 허기짐을 해결하고 생명을 이어나가는 수단이다. 하지만 이 수단에 갖은 의미와 군더더기를 붙이는 순간 밥은 밥 다워지지 않는다. 내가 밥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아래와 같다.
밥에 한이 서린 사람: 나의 상사
나의 상사였던 팀장은 밥에 대한 짙은 한이 서려보였다. 남의 돈으로 밥을 얻어 먹을 기회를 찾아다니며, 최대한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싶어서 굶주린 짐승처럼 군다. 그의 부하들은 바쁜 업무 시간에서 맛집을 섭외하고 승인을 받느라 시간을 버리거나, 혹은 먹자골목을 두시간 넘게 뱅뱅 돌면서 그의 식사 메뉴에 대한 의중을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쉽게 자신의 의중을 알려주지 않는 그녀와 스무고개를 넘을 때면 체력이 고갈 돼 나의 숨도 넘어갈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렇게 외부에서 발생한 식사 비용은 부하 직원이 개인 카드로 긁고 회사에 청구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팀장은 항상 무리한 요구를 한다. 99%의 확률로 팀장은 회사에서 허용하는 접대비 한도 이상으로 주문을 강요한다. 지시를 거부할 수 없는 부하 직원은 사전에 승인 받지 않은 초과 한도가 상환 가능할지 여부도 알 수 없는 부담감을 억누르고 카드를 긁어야 한다. 물론, 회계팀에 불려가 해명해야 하는 것도 부하 직원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팀장인 그녀는 때때로 사내 점심 식사 자리에서도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직원들이 집에서 가져온 도시락을 펼쳐 놓고 밥을 먹을 때면 자기도 그 자리에 껴서 얄미운 행동을 한다. 그녀는 항상 말라 비틀어진 총각김치 정도만 싸오는데, 항상 도시락을 풍성하게 싸오는 직원들에게서 반찬을 뺏어 먹는다. 아마도 그녀는 유년시절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거나 그에 상응하는 수준의 경험을 겪게 되어 밥에 대한 애착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집착 수준으로 변질 된게 아닌가 싶다.
이 정도는 애교로 넘긴다고 치자.
그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도시락 먹는 자리에서 품평회까지 연다. 남의 반찬이 어쨌니 저쨌니, 남이 먹는 모습이 누구는 복스럽고 보기 좋은데, 누구는 먹는 것 같지도 않게 깨작거린다느니 매번 빠지지 않고 언급한다. 듣는 대상이 불편할 정도로 왜 그런 식으로 먹는지에 대해 꼬치꼬치 묻고 대답을 듣고 싶어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저녁에 '레드 와인 한잔에 라코타 치즈'를 먹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우쭐한 표정으로 말하곤 한다. 리코타를 라코타로 바꿔 말하면서 우월감에 도취된 듯한 그녀의 표정은 볼만 하다. 밥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자기 자신도 고매한 수준으로 평하는 그녀를 보면 밥은 분명 그녀에게 아주 중요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OO씨~ 우리 맛있는 거 먹자!"
"우리 맛있는 밥 한번 먹어요~"
팀장이 제일 자주 했던, 어쩌면 흔하면 흔한 저 말들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됐다.
밥을 통해 인정 받기를 원한다
식사를 차린다는 건 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이다. 특히 삼시세끼 밥상을 차리면서, 식재료는 직접 손수 끼니 시간 사이사이에 공수를 해와야만 하는 구조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나의 엄마는 그렇게 살아 왔다. 공휴일 없이 한식 밥상을 비효율적인 방법으로만 차려야 한다는 건 매우 지치고 힘든 일이다.
엄마는 밥으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싶어하며, 가끔은 밥으로 아빠와 나를 협박한다. "내가 수십년간 밥해줬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내 말 안 들을거면 앞으로 밥 얻어먹지마", "내일부터는 밥 없어"는 엄마가 들어주기 곤란한 요구를 억지로 들이 밀 때 자주 쓰는 멘트다. 거기에 대고 정말로 알겠다고 하면 큰일 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한다. 당연히도 엄마는 그동안 밥을 해오며 힘들었기 때문에, 내가 어려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서 그 노고를 전혀 알아주지 않는다.
밥상에서의 식사도 편안하지 않다. 여러 반찬 중 지정해준 것만 먹어야 하며 계속해서 반응을 들려줘야 한다. 먹고 싶지 않지만 엄마가 원하면 계속 해서 먹고 끊임없이 원하는 반응을 보여줘야 하며, 반응을 요구할 때마다 꼭 응답 해줘야 한다. 아빠는 밥상에서 자신의 권위를 인정 받기 원하고, 엄마는 자신의 노고를 인정 받기 원한다. 나는 그 사이에 껴서 양쪽에서 들려오는 요구를 들어주느라 진이 빠진다. 두 분이 밥상에서 싸우기라도 하면 뜯어 말려야 한다.
나에게 이러한 밥은 참 피곤하다.
남가지 말고 먹어
다행인 것은 예전에 비해 밥을 남기는 것에 엄마가 관대해졌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남기겠냐는 것으로 생각하고 억지로 먹는게 더 건강에 좋지 않다고 남기라고 해주신다. 남기지 않고 먹는 것은 집에서도 요구되지 않는 덕목인데, 이걸 남자친구에게 요구 받을 때가 많다.
보통 남자친구는 배가 고프면 음식을 많이 시키는 걸 좋아한다. 사이드를 추가하거나 메인 요리 개수를 늘려서 시키곤 한다. 나는 그럴 때면, 나는 내꺼만 먹을테니 본인이 먹을 수 있는만큼만 시키라고 한다. 이런 얘기를 하면 남자친구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면서 음식을 주문한다.
남자친구는 먹는 의욕은 많지만 식사량이 의욕을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음식이 남게 된다. 그러면 자기가 먹다가 남은 음식을 손으로 가르키며 '이거 남기지 말고 다 먹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을 때 알 수 없는 짜증이 솟구치는 걸 느끼곤 했는데, 뒤늦게서야 이 감정이 황당함이라는 걸 알게 됐다. 자기가 양 조절을 하지 못한 걸 나한테 미루는 것처럼 보였고, 내가 먹는 건 알아서 먹는건데 남기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도 짜증나고, 벌써부터 잔반을 내 뱃속에 밀어 넣는 식으로 처리하는 아줌마들의 비참한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음식 쓰레기를 만드는게 싫으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서 찾으면 되지, 내가 싫은 걸 억지로 시키는 건 진짜 싫다. 내 감정을 모를 때는 기분이 나빠도 꾹 참고 따라줬는데, 이제는 확실하게 말해야겠다. 남기지 말고 먹으라고 시키는거 선 넘는 말이라 정말 싫다고.
한국 사회에서 언급되는 따듯한 밥
"우리 엄마는/아내는 따듯한 밥 한번 해준 적도 없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황당함에 혈압이 오른다. 흔히 사랑과 전쟁에서 나오는 이혼 조정 위원회에 부부가 참석했을 때나, 가족 상담 장면에서 엄마/아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때 나오는 말인데, 이 또한 밥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밥을 꼭 특정 대상을 통해 제공을 받아 본인의 신체적, 심리적 욕구를 해결해야겠다는 그 집착이 사람을 지겹게 한다.
글의 마무리
그래서 결론은 [밥은 밥답게!]. 의미를 부여할 거면 그저 좋게 남을 것만 붙이면 좋겠다. 내가 어떤 특정한 기대를 갖고 밥을 통해 상대에게 불편한 점을 강요하는 건 싫다. 명절에 흔히들 먹는 전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맛있는 음식으로 남아도, 어떤 사람에게는 '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무겁고 불쾌한 감정이 밀려오는 것도 그 음식이 음식 이상의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붙었기 때문일거다.
이제 노이로제 없이 밥을 먹고 싶다. 밥을 통해 남에게 어거지를 부리거나 불편한 요구를 하지 마세요!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중동 카페 소피아 작업실은 밀크티다 (0) | 2021.11.02 |
---|---|
좋은글) 잘하는 것보단 오랫동안 꾸준히 (0) | 2021.10.22 |
동국대 헤베커피헤서는 헤베커피를 드세요 (0) | 2021.10.13 |
춘천 감자빵은 메가커피에서 (0) | 2021.10.13 |
재경관리사 공부기간, 합격후기, 인강, 공부방법 (5) | 2021.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