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육 강론 등

3월 27일(수)

구땡구 2024. 3. 2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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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오 26, 14-25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강론 정리

 

하루 뒤에 쓰는 거라 내용이 부정확할 수 있음

 

나의 생각을 고집해서 사는 삶
하느님이 뜻에 맞는지 묻고는 있는지?
하느님이 뜻하시는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는 하는지?

 

예수님의 육화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을 때는 철저히 사람으로 오셨다는 걸 염두해야 한다. 몇날 몇시에 누가 나를 팔아넘길 거다라는 예언은 못 하셨을 것. 그러나,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갖고 오셨기 때문에 예측은 가능하셨을 거라고 봐야 한다. 
 
유다 이스카리옷을 살펴보자. 처음부터 배반할 사람임을 알고 뽑으셨을까? 누군가에게 돈과 금고를 맡기는 일은(회계장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긴다. 따라서 유다는 예수님의 신임을 받았던 사람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한 그가 은화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일을 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팔아넘길려고 작정했던 게 아닐 수도 있다. 본인이 하는 행동이 예수님을 매도하는 행위라는 걸 인지하지도 못 했을 개연성이 있다.
 
그의 이름을 살펴보면, '이스카리옷'은 sicarii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을 확률이 높다. 동 단어는 '단도'라는 뜻을 갖는데, 그 당시 무력으로 헤로데 왕과 빌라도를 갈아 엎길 희망했던 '혁명당원'을 의미하기도 했다. 유다 역시 시몬처럼 혁명당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유다 역시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을 거라 유추 가능하다. 그러한 유다가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본인 생각과 다른 예수님의 가르침에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을 수도 있다. 당장 군중을 일으켜 이민족을 갈아 엎고 민족을 해방시켜 주기만을 바랬는데, 예수님은 '희생, 사랑, 용서'처럼 유약해보이는 가르침만 주니 본인 생각과 맞지 않았던 거다. 
 
유다 제 딴에는 예수님을 일부러 사지에 내몬 것이다. 궁지에 빠지면 예수님이 봉기라도 일으켜 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제 뜻을 이루고자 예수님을 이용한 꼴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벌인 일을 후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말을 맞게 된다.
 
25절에 유다는 "스승님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고(히브리어, 라틴어 성경에는 '설마'가 들어있음),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하셨다. 옛날 번역에는 "그건 네 말이다"라고 되어있음. ('그건 네 생각이다'라는 뜻이 아닌가 싶음)
우리 역시 나의 뜻, 나의 생각에 매몰되어, 하느님의 뜻에 앞서 내 생각만 집착하고 고집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나를 철저히 비우고 정화해야, 하느님의 것을 내 안에 채울 수 있다.

 


나의 생각

 

유다는 유다 본인이 생각하는 '선'이 있었던 것 같음. 그리고 그 선을 하느님의 선보다 우선시했음. 은연 중에 본인을 예수님보다 더 위에 두었던 게 아닐까.
 
유다는 아마 '지금 내 행동이 옳지 않고, 당신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 편이 당신에게도 좋은 것 아니겠소?'라는 생각을 한 것 같음. 유다가 끝까지 본인의 생각을 관철하려던 것이, 예수님을 기만하는 행위가 됨.
 
유다가 본인 생각에 매몰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민족해방'이라는 염원은 당시 본인 외에도 민족의 염원이었을테니 그 생각을 우선시하는 게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 본인이 취한 방법은 옳지 않지만, 이로써 예수님이 민족해방을 이뤄주시면,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니 예수님도 결국엔 본인의 '사소한' 잘못을 용서해줄 것이라고 정당화했을 수도 있음.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혹은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 정말 그를 위한 것이 맞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음. 
 
아울러 유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가 없었던 것 같다. 본인의 고정관념을 한계로 세상을 바라보기에, 그것만이 옳고 무조건 이루어내야 한다는 집착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유다를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겹쳐 보게 된다. 남들도 동의할, 그럴싸한 현실적인 이유를 대면서 기만적인 행동을 하고 살지는 않는지 생각해 본다. 나의 지혜의 한계로 내 생각이 최고의 선이라고 고집하고, 실천하려 애쓰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본인이 한 행동이 무엇인지도 알아치리지도 못 하면서, '스승님 혹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는 유다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바라본다.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오 26,39)”라고 기도하신 것도 떠올려 본다.
 
아버지의 지혜와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항상 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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