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육 강론 등
2월 21일(수)
구땡구
2024. 2. 2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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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예언서 3,4-5: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사이드 지식>
- 요나가 니네베를 가로지르는 데 사흘이 걸렸다: 사흘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걸리는 시간, 인간의 인생을 상징
- 사십 일: 회개를 준비하는 정화의 시간을 상징,회개를 하기 위해 주어진 충분한 인간의 시간(인생일 듯?)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하나?>
- 비움 + 정화 = 회개
- 단식은 문자 그대로 굶으면서 기도하는 걸 의미할 수 있지만, '마음의 단식'이라는 측면도 가능. 마음을 비워냄을 상징
- (1) 분노를 비움: 남이 던진 돌멩이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은 결국 내가 곱씹고 의미를 붙이기 때문
- (2) 편견을 비움: 나의 왜곡된 생각.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고집이 정말 맞는 걸까?
- (2) 욕심을 비움: 현재에 만족하는 가? 그렇다면 아침마다 감사의 찬미가 우러나오는가?
- 자루옷은 히랍어, 라틴어 말로는 사아코스(?, 정확히 적진 못 함)이며 un sac의 기원이 되는 말임. 가방을 입었다는 것은 아님. 그건 모름. 또한 수컷 염소털로 만든 허접한 옷을 지칭하기도 함. 한편 라틴어 사전에는 'filter'라는 뜻도 있음. 마치 탕약을 거르는 삼베 천과 유사. 자루옷은 '끊임없는 자기정화'로 해석할 수 있음. 마음을 깨끗이 하는 삶
<나의 이모저모...>
예수님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광야에 가서 40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강론을 듣고 이 장면을 다시 떠올리니 느낌이 새로웠다.
40일은 정화를 해야 하는 시간, 허락된 수명이자 스스로를 정화할 충분한 시간을 의미하며, 그 시간 동안에는 끊임없이 온갖 시련과 유혹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곳은 척박한 광야라는 공간... 그 공간에 이끈 것은 성령의 계획...
그 유혹 많은 척박한 곳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절하면 이 세상을 주겠다'라는 말에도,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말에도 응하지 않으셨다. 인간인 나 역시 같은 공간을 살아간다. 오늘날 전반적으로 물질적인 풍요는 이루었다고 하나, 나는 여전히 메말랐고 나를 제외한 도시는 반짝거리는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얼마나 많이 굴복을 하고 살았던가...
이전에는 신자가 되면 모든 것이 편안해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간 수차례 감흥없이 읽었던 성경의 대목이, 신앙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만 같다. 그렇구나...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인간을 광야로 이끄시는구나... 내가 해야 할 것은 내 안에 죄된 속성(분노, 편견, 욕심 등)을 비우고 끊없이 마음을 깨끗이 걸러야 하겠구나... 죄가 될 행동을 합리화하고 절충을 봐서는 안 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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